[liner note] Gigi, "Maintenant" by 석원

* Bandiera뮤직에서 국내발매한 앨범을 위해 쓴 라이너 노트입니다.

21세기가 20세기와 작별하기 위한 백 투 더 퓨처
지지Gigi "Maintenant"



진한 커피나 홍차 한잔과 함께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자. 팝의 이러저러한 잔재미들 말고, 동상이라도 하나 세워줘야 할 것 같은 정상급 뮤지션들의 연주실력 말고, 죄책감과 쾌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음습한 무대 말고, 클럽의 원초적 비트 말고, 당신이 마지막으로 팝의 사운드 그 자체만으로 순수한 즐거움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는가? 그러니까 “Pet Sounds”나 “Rubber Soul”이나 “Dusty in Memphis”가 안겨주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은 언제인지?

물론 이 질문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그런 사운드가 그리우면 언제라도 “Pet Sounds”나 “Rubber Soul”을 꺼내 들으면 된다. 그리고 자칫 이런 종류의 노스탤지어는 도를 지나치면 보수적인 정도가 아니라 반동의 수준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 ‘슈게이징 밴드 열 트럭보다 비틀즈가 더 낫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

기술적으로도 과거의 사운드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익스플로러스 클럽The Explorers Club이 있고, 걸그룹의 재림은 피펫츠The Pipettes가 있고, 랫팩Rat Pack은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를 통해 부활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모방과 복제의 불안한 경계 위에만 존재한다.

사이키델릭 운동 이후 대중음악은 무수히 많은 갑옷을 뒤집어 쓴 형태로 발전했다. 누가 더 많은, 더 새로운 외장을 덧붙였는지가 중요해진 마당에 검투사처럼 가죽팬티 하나 걸치고 덤벼드는 그런 도전은 팝의 무대에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신서사이저가 40인조 오케스트라를 대체하고 AM라디오와 주크박스가 인터넷으로 교체되는 변혁이 끝난 시대에 멜로디와 하모니만으로 상상력을 이끌어내려는 음악은 복고가 아니라 개그로 오해받기 쉽다. 그래서 치장과 화장을 모두 걷어낸 벌거벗은 사운드의 순수한 아름다움만으로 승부하는 그런 팝을 21세기의 거리를 걷다가 마주칠 확률은 인사동 뒷골목에서 믹 재거Mick Jagger를 만날 가능성보다 낮다.

하지만 고맙게도 확률이 영점을 기록하지 않는 이상 기적은 언제나 기대할 만한 희망이 된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날아온 이 한 장의 CD를 플레이어에 집어넣는 순간 우리는 음악이 복잡한 문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즐거움과 포만감을 안겨주는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된다. 모든 요소를 배제한 사운드만의 순수한 재미와 즐거움은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이 죽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다.

이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은 두 명의 캐나다인이다. 프로듀서인 콜린 스튜어트Colin Stewart와 캐나다 인디 신에서 활동하는 직업적 뮤지션 닉 커고비치Nick Krgovich는 2005년 우연한 기회에 필 스펙터Phil Spector나 브릴 빌딩Brill Building 스타일의 고전적인 사운드를 지금의 스튜디오에서도 재현 할 수 있는지 시도했다. 그 결과에 스스로 놀란 두 사람은 이후 4년 동안 팝과 록의 고전적인 사운드를 재현하는 세션을 자신들의 본업(스튜어트는 프로듀싱, 커고비치는 자기가 속한 두 밴드 피:아노P:ano와 노 키즈No Kids 활동)과 병행했다. 세션의 결과를 정리한 앨범은 2010년 1월, 독일의 톰랩Tomlab 레이블을 통해 발표했다. 앨범의 타이틀은 “Maintenant(‘지금’, ‘현재’라는 뜻의 프랑스어)”라고 붙였고, 프로젝트 밴드의 이름은 고전뮤지컬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지지Gigi로 정했다. 두 사람 모두 캐나다의 영어권지역 출신이면서 밴드이름과 앨범 타이틀 모두 프랑스와 연결한 점이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대로 “Maintenant” 앨범의 사운드는 더도 덜도 아닌 필 스펙터 스타일의 팝이다. 커고비치와 스튜어트는 지지라는 프로젝트가 스펙터의 초기 작품들을 집대성한 “Back To Mono” 앨범 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Maintenant”의 요소요소가 모두 “Back To Mono” 박스세트의 충실한 재현인 셈이다.

필 스펙터 사운드의 기둥은 ‘소리의 벽The Wall of Sound’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법에 있다. 말로 설명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것은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다수의 같은 악기를 동시에 녹음해 소리를 그 자체로 풍부하게 만들고 또 여러 다른 악기나 목소리는 에코를 더해 서로 섞어놓는 것이다. 벽돌들이 서로 맞물려 거대한 벽을 이룬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소리의 벽은 저가의 오디오, AM라디오, 주크박스에는 잘 어울리는 전략이지만 모든 소리를 정교하게 가다듬고 분리해야 하는 스테레오의 전략과는 상극이다. 또한 보컬이든 기타든 주도하는 세력이 분명해야 하는 오늘 날의 추세와도 맞지 않다. 이것이 필 스펙터가 비틀즈의 “Let It Be” 앨범을 손봤을 때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반발한 이유이기도 하다.

콜린 스튜어트는 베이스 드럼의 경계를 무너뜨려 마치 팀파니처럼 웅장하게 들리는 드럼비트를 기반으로 기타를 포함한 여러 현악기와 브라스를 덧입혀 필 스펙터의 전매특허를 재현했다. 보컬도 자신의 음악을 직접 표현할 수 없는 프로듀서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뮤지션들을 도구로 사용했던 필 스펙터처럼 앨범에 수록된 15곡의 메인 보컬을 모두 다르게 구성했다. 게스트 보컬을 사용하는 프로젝트 밴드의 사례야 많지만 동일한 밴드의 이름을 달고 있는 앨범에서 매번 다른 보컬을 등장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앨범의 통일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선택해서는 안 되는 길이다. 그러나 “Back To Mono”를 통해 서로 다른 개성들도 필 스펙터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용해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런 접근이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앨범 자체는 스테레오로 믹싱 되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좌우채널의 분리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거의 모노처럼 들린다. 이것도 필 스펙터의 ‘팝은 모노로Back To Mono!’라는 구호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No, My Heart Will Go On’과 ‘'Neathe the Streetlights’은 앨범의 첫 세션인 2005년 5월 20일에 녹음된 곡으로 2트랙만을 사용해 오버더빙 없이 스튜디오 라이브 형식으로 녹음했다.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방법론마저도 필 스펙터의 방식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Neathe the Streetlights’은 닉 커고비치가 직접 리드보컬을 맡은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이 앨범의 모든 수록곡은 그가 작곡했다.)

그러다 보니 “Maintenant” 앨범은 작업기간도 4년이나 걸렸지만 동원된 뮤지션의 수만도 커고비치와 스튜어트를 포함해 연인원 40명에 달한다.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치기어린 패러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커고비치와 스튜어트는 자신들의 프로젝트가 필 스펙터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로로 스펙터 사단과 연결되는 다른 중요한 인물들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들이 직접 지목한 이름은 샹그리라스The Shangri-Las로 유명한 프로듀서 쉐도우 모튼Shadow Morton, 샹그리라스의 걸작 ‘Leader of the Pack’을 작곡한 엘리 그린위치Ellie Greenwich, 그린위치의 남편이자 필 스펙터의 히트곡 다수를 작곡한 제프 베리Jeff Barry 등이다. 모두 필 스펙터를 중심으로 연결된 거미줄의 일원이며 브릴 빌딩 사운드라고 불리는 60년대 초반 미동부지역 팝 트렌드의 구성원들이다.

사운드에 어울리게 노랫말들도 브릴 빌딩 히트곡처럼 간결하고 단순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군데군데 재미난 요소들도 눈에 보인다. 첫 곡의 제목에 들어간 ‘My Heart Will Go On’은 노랫말에 나오듯이 같은 캐나다인 아티스트 셀린 디옹Céline Dion이 부른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가 맞다. ‘Alone at the Pier’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96 Tears’는 퀘스쳔마크 앤 더 미스티리언스? & the Mysterians의 1966년도 히트곡이다. 이어지는 트랙 ‘Everyone Can Tell’에도 1951년 페티 페이지Patti Page가 히트시킨 ‘Mockin' Bird Hill’이 등장한다. ‘The Marquee’에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나오는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가 언급된다.

프로젝트 밴드인 지지가 창조적인 엔진으로서 지속될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밴드의 두 기둥인 커고비치와 스튜어트 모두 밴드 활동과 프로듀서라는 본업이 있고, 이런 형식의 앨범이 연속해서 시장에 선보이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어쩌면 이 앨범은 아시아나 한국의 리스너들에게는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그런 작품이다. 그러나 새롭게 깃발을 내건 반디에라 뮤직Bandiera Music 레이블이 첫 작품으로 선택함으로써 연착륙하게 되었다. 첫 번째라는 수학적 의미를 강조하기 전에, 아마도 반디에라 뮤직이 보여줄 음악 색깔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앨범은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싶다.

디지털 시대 대중음악의 지향점을 이야기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앨범이지만, 소리를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고 가급적이면 그 소리가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갖춰야 한다는 팝의 미덕을 생각해보면 “Maintenant”는 20세기와 작별하기 위해서라도 21세기가 꼭 들어봐야 하는 작업이다.



by 장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