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스 카커의 정치적 바이오그라피 by 석원

몇년 전 모매체에서 퇴짜먹은 원고입니다. 그 이후 몇번이나 재활용(?)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그냥 블로그에 올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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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을 선택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자 - 자비스 카커


9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밴드 운동을 사람들은 브릿팝Britpop이라고 불렀다. 펑크 이후 영국대중음악계에 그토록 많은 대중들을 참여시켰던 물결은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잡지들은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를 우리 시대의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로 추켜세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확실히 오아시스와 블러는 브릿팝의 중심이자, 기둥이며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둘과 함께 삼두정치를 이루었던 밴드가 '펄프Pulp'다.

국내에서는 이상하게 스웨이드Suede나 버브Verve 같은 후배밴드들 보다 덜 인기가 있었지만 펄프는 분명히 브릿팝의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였다. 90년대 중반 기타 하나 둘러메고 홍대 앞을 서성이던 청춘들에게 '보통사람Common People', '디스코 2000Disco 2000'같은 펄프의 히트곡들은 교양필수이며 일용할 양식이었다.

펄프는 1983년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지만 그 기원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셰필드의 또래친구들이 모여 밴드를 만들었고 그 중심에 자비스 카커Jarvis Cocker가 있었다. 카커는 1963년 아버지와 삼촌들 모두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과 어울렸던 셰필드 출신의 음악인들 중에는 지역과 성이 같아서 종종 친척으로 오해받곤 하는 조 카커Joe Cocker도 있다.

셰필드는 영국사람들이 반농담조로 '사우스요크셔사회주의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중심도시다. 그만큼 좌익운동과 노동당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이 도시에서 자비스 카커는 유년기를 보냈다.

대중문화이며 동시에 계급문화인 영국의 록

노동계급으로 태어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길은 축구선수가 되거나 록스타가 되거나 둘밖에 없다는 영국에서 록밴드들이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60년대 초반 폴 매카트니가 "우리(비틀즈)는 노동계급 출신이고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공인한 이후 최소한 영국의 록은 계급문화와의 암묵적 연계 속에서 이해됐다.

그런 측면에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가 노동당정권의 창출을 위해 앞장섰던 사실과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이 노동당 좌파의 지도자인 토니 벤과 함께 순회강연을 다닌 경험은 미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영국 록 무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자'임을 공인했던 자비스 카커는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끝장내야 한다며 영국 전역의 대중음악인들이 봉기수준의 결집력을 보여줬던 1997년 총선의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신노동당에 대한 강한 불신

자비스 카커가 리더이긴 했지만 펄프라는 밴드 자체가 반자본주의를 선전하는 팀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다른 밴드들과 비교할 때 분명히 급진적인 색채가 그들의 음악에서는 항상 묻어났다.

앞서 이야기한 '보통사람'과 '디스코 2000' 두곡이 실려 있으며 펄프에게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준 1995년도 앨범 "다른 계급Different Class"을 놓고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고는 "행복한 사랑노래를 표방한 계급투쟁의 노래들"이라고 분석했다.

3년 뒤에 발표한 다음 작품 "이 앨범은 하드 코어This Is Hardcore"에 수록된 '혁명 그 다음날The Day After the Revolution'은 그 전해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하면서 블레어 정권이 출범했을 때의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그리고 있다. 혁명은 시작하는 날 끝나버렸다는 불안한 예언은 블레어가 복지축소정책을 발표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앨범에는 수록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발표된 싱글의 뒷면에 담아 조심스럽게 발표한 노래 '코카인 사회주의Cocaine Socialism'는 보다 직접적으로 갓 출범한 노동당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코카인 사회주의'는 자비스 카커가 97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에 동참해달라고 찾아온 노동당 관계자를 문전박대했던 경험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제목은 신노동당의 선전가들을 거리에서 감언이설로 코카인을 파는 마약판매상들에 비유하고 있다.

또 3년이 지난 뒤 펄프는 마지막 앨범 "우리는 인생을 사랑한다We Love Life"를 발표했다. 첫 싱글인 '일출Sunrise'이 발매되자 코카콜라가 TV광고에 이 노래를 사용하는 대가로 10만파운드를 제안했다. 거의 2억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하지만 밴드는 제안을 거절했다. 자비스 카커는 "이 노래는 다국적기업같은 새로운 물결에 상처받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다. 그런 노래를 상품광고에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그가 노동당에 마음을 줄 수 없는 이유

1년 뒤 펄프는 그간의 활동을 결산하는 베스트 앨범 "히트Hits"를 내놓고 밴드를 해산했다. 이 앨범에는 유일한 신곡인 '광부파업의 마지막 날Last Day Of The Miners Strike'이 실려 있다. 대처정권과 영국탄광노조NUM가 대립했던 1984~85년의 총파업을 그린 노래다.

자비스 카커가 나고 자란 셰필드는 광부파업의 본거지 중의 하나였다. 많은 영국인들이 그랬지만 갓 스무살을 넘긴 그의 눈에 비친 총파업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 버릴만한 사건이었다. 파업은 2년을 버텼지만 결과는 잘 알려져 있듯이 대처정권의 압승이었다. 보수당은 애초 목표대로 탄광노조가 아니라 탄광산업 자체를 날려버렸다.

이 노래에서 자비스 카커는 꿈속에서 83년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파업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그에게 기세 좋은 현장의 열기는 또 다른 연민으로 다가온다. 84년이 지나고 85년이 지나고 노래는 87년 영국총선으로 끝난다. 카커는 당시 총선에서 보수당의 산업정책에 부화뇌동한 노동당을 비난하고 있다.

그가 정확히 10년 뒤 블레어의 선거운동에 선뜻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은 이 기억 때문이다. '혁명 그 다음날'에도 보면 "이제 셰필드는 끝장났다"는 가사가 나온다.

펄프가 해산 한 후 한동안 음악활동을 멀리하던 그는 2005년 영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 깜짝 출연해 팬들을 기쁘게 했다. 같은 영화의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올해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후 첫 번째 솔로앨범인 "자비스Jarvis"를 발표했다.

2006년 첫 솔로앨범 발표

솔로 앨범 발매에 앞서 자비스 카커는 인터넷을 통해 '교활함이 세상을 지배한다Running the World'는 곡을 먼저 공개했다. 이 노래는 2005년 7월 열린 서방선진8개국정상회담(G8)에 맞춰 열린 "Live 8" 공연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Live 8은 1985년에 열린 "라이브 에이드Live Aid" 20주년을 기념하고 세계의 기아문제 해결을 위해 기획된 자선공연이었다. 대규모 공연을 통해 G8회담장에 모인 선진국의 정상들을 압박해 제3세계의 부채탕감을 이끌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20년 전의 단순한 자선콘서트보다는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러나 유명한 팝가수들이 세계기아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지만 당일 무대에 오른 쟁쟁한 아티스트들의 재산은 둘째 치고 그들이 지금까지 지불한 이혼위자료만 다 모아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의 몇 년치 국가예산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씁쓸한 면도 없지 않았다. 20년 전 라이브 에이드가 끝났을 때 첨바왐바가 "결국 굶주린 아프리카의 아이들 사진을 핑계로 레코드 한 장 더 팔아먹으려는 것 아니냐"고 조롱했던 역할을 자비스 카커가 이어받은 것이다.

앨범 홍보를 위해 비슷한 시기 영국의 TV음악쇼 "줄스 홀랜드와의 저녁"에 출연한 자비스 카커는 "글로벌자본주의의 죄악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솔로앨범에는 반세계화 운동의 활성화 이후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는 경찰의 폭력성 문제를 다룬 '비만의 아이들Fat Children'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드러난 영국과 미국정권의 오만함을 비판한 '아우슈비츠에서 입스위치까지From Auschwitz To Ipswich' 등이 실려 있다.

나는 '사람'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자비스 카커는 1998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노래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물론 빌리 브랙(영국의 대표적인 좌익뮤지션)같은 의미로 정치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 노래를 듣고 '이 친구는 보수당에 투표하겠군'이라고 생각한다면 전 매우 당황할 겁니다. 저는 노래에 사회주의적인 시각을 담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통해 제 작품들이 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기를 희망합니다."



덧글

  • widow7 2009/12/01 11:51 # 삭제

    갑자기 펄프가 레이지어겐스트머신처럼 사랑스러워 보이려고 합니다.....hits 앨범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 석원 2009/12/04 01:06 #

    꽤 잘 만든 컴필레이션이죠. 그래도 "다른 계급"은 구입을 고려해보심이. 딜럭스 에디션이 싸게 나왔습니다. ㅋㅋ
  • giantroot 2009/12/01 12:14 # 삭제

    그러고보니 Running the World는 칠드런 오브 멘 엔딩 테마로 쓰였죠.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어찌보면 펄프는 브릿팝 세대 중에서 매닉스와 함께 가장 좌익적인(혹은 반골) 입장에 선 밴드 아니였을까 해요. (본격 루저찌질이 선동 곡 'Mis-Shape'나 'Common People'도 그랬지만...) 다만 매닉스는 낭만적인 투사라면 이들은 현실의 순리를 교묘하게 간파하고 그 속을 뚫고 간다는 점에서 꽤 지략적인 테러리스트죠.

    여튼 이번 자비스 신보는 꽤 괜찮더라고요. 좀 더 펄프 시절의 음악에 다가선듯한 인상이였습니다.
  • 석원 2009/12/04 01:08 #

    1. "칠드런 오브 멘"이 뭔가요?

    2. 펄프라는 밴드 자체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지향을 드러내지는 않았지요. 특히 매닉스에 비하면.

    3. 테러리스트라는 단어 잘못쓰면 미국 아찌들이 와서 맴배 한다능...

    4. giantroot님이 고른 최고의 매닉스 앨범은?
  • giantroot 2009/12/04 20:37 # 삭제

    1. P.D.제임스 원작 소설과 그걸 영화화한 영화입니다. 불임으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이 더 이상 임신 못하는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한 SF 영화인데, 정말 좋습니다. 꼭 보세요. 감독이 알폰소 쿠아론인데 차기작은 꼭 극장에서 볼 예정입니다.

    여튼 그 영화에서 엔딩 테마로 Running the World하고 존 레논의 Bring on the Luice가 쓰였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음악이 좋은 영화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비스 코커 아저씨는 쿠아론 감독의 전작인 위대한 유산에도 펄프 명의로 곡을 제공했더라고요.)

    2. 그 점 동의합니다. 사실 노골적이진 않았죠. 무척 교묘하게 정치적인 성향을 만들어갔다고 할까요.

    3. 뭐 돈 없고 빽 없는 가난한 예술 학교 학생 털어봤자 남는건 없다능 (...)

    4. 어 최고작 중 하나인 홀리 바이블은 못 들어서 뽑기 애매한데;; 일단 Everything Must Go를 뽑겠습니다.
  • 유투왕빠 2009/12/01 18:10 # 삭제

    펄프도 전집 다파고 싶은 밴드중 하난데... 아직 저도 다른 계급..앨범이랑, 이게 하드코어다 앨범밖에 없네요... 위두앨범은 정말 버릴곡이 한곡도 없는듯.. 작년엔가 두앨범모두 두장짜리 디럭스반이 나와서 삿는데, 시디2의 비사이드곡들도 모두 예술이더군요.. 아직 비틀스솔로작들 듣느라 어쩔수없이 미뤄두고 있지만, 이거 마무리??되는되로, 다시 펄프를 파볼까합니다..ㅋㅋ
  • 석원 2009/12/04 01:08 #

    그거 두장이면 파실만큼 파신거 아닌가요?
  • silent man 2009/12/01 21:01 # 삭제

    좋군요!!

    디스이즈하드코어 앨범 커버 만큼이나. (웃음)
  • 석원 2009/12/04 01:10 #

    아...하...하

    이거 참 동의해야 하는데 그러기도 뭐하고...헐헐

    부클릿 안쪽 사진도 ...꽤 좋지요.
  • 양고기 2009/12/02 00:27 #

    펄프 요즘 정말 좋아하는 밴든데...자비스 코커의 정치적 바이오그라피 읽어보니 꽤 심오하네요. 그냥 사랑음악으로만 다가왔는데 말이죠;;;
  • 석원 2009/12/04 01:11 #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고 말하면 절 미워하실껀가요?

    (어디서 어설픈 애교질이야!!!)
  • 지기 2009/12/02 23:18 #

    저도 글보고 자비스 형이 더 사랑스러워 졌습니다. 제대로 가사를 들춰본건 청춘들의 일용할 양식인 보통놈들이랑 디스코이천 뿐이었는데, 딴 가사들도 찾아봐야 겠어요~ (들리지가 않으니...)
  • 석원 2009/12/04 01:13 #

    디스코 투따우전드의 노래말은 정말 있지도 않았던 안타까운 첫사랑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험은 진짜 없었는데 말이죠.
  • 2009/12/09 22:07 # 삭제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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