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ter the Vaselines - 인디록의 용쟁호투
The Vaselines, "Enter the Vaselines" 국내판(비트볼)을 위해 쓴 라이너 노트
인디Indie란 무엇인가? 태도인가? 정신인가? 아니면 스타일인가?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의미가 변색됐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디의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은 '비틀즈 혁명' 이후 통제가 불가능해질 만큼 거대해진 음악산업, 그러니까 대형 음반사과 프로모터와 TV네트워크와 저널리즘에 대해 아티스트 입장에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선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대중음악의 길을 걷되 메이저 레이블이 제공하는 호텔과 비행기, 5만 명이 기다리는 스타디움 공연, 유명음악잡지의 커버, TV쇼의 게스트 출연은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다. 매일 밤 자기 영혼을 거대자본에 팔아넘겼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 행복도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인디의 정신과 음악비즈네스의 규칙 사이에서 위태로운 양다리 걸치기를 선택했지만 애초에 그런 현명한 조화는 불가능했다. 어쩌면 자살은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도 자기 음악의 주인이기를 원했던 이 천재에게 밴드의 길은 끊임없는 타협과 배신의 길이었다. 처음엔 메이저 레이블과의 계약서가, 그 다음엔 대형 공연이, 마침내 그토록 증오했던 롤링스톤의 표지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는 전설로 남은 MTV의 언플러그드 출연을 통해 네트워크와도 타협했다. 커트 코베인이 그 무대에서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부를 때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러나 그 노래 앞에 바셀린즈The Vaselines의 'Jesus Doesn't Want Me for a Sunbeam'을 배치해 자기가 진짜 꿈꿨던 밴드란 어떤 길을 걷는 것이었는지 강변했다. 바로 자유가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인디밴드의 길이었다.
커트 코베인이 진정 사랑했던 밴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커트 코베인이라는 전도사를 통해 바셀린즈를 영접했다. 사실 바셀린즈는 커트 코베인이 열정적으로 그들의 노래를 커버하고, 자신들의 무대에 세우고, 수많은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골치 아픈 인디록 수집가들 사이에서나 존재할 밴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밴드가 자살한 전도사의 은덕 때문에 과대포장된 밴드라는 뜻은 아니다. 바셀린즈의 사운드에는 분명히 스코틀랜드나 인디라는 범주로 축소시킬 수 없는 힘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이들의 데뷔 EP 첫 곡 'Son of a Gun'을 들어보자. 이건 분명 성공할 의사도 없고, 시대의 흐름이나 대중의 취향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선언이다. 데뷔음반의 첫머리를 이렇게 장식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밴드가 몇이나 될까.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가 대충 이런 분위기를 띠려고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마케팅 전략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더욱이 바셀린즈는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대처여사의 반혁명이 온 영국을 평정한 1987년에 데뷔했다.
사운드의 측면에서 바셀린즈는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다. 그런 점에서 인디록을 미국에 대한 영국 서브컬쳐의 독립선언쯤으로 여겼던 DJ 존 필John Peel과 인디레이블 러프트레이드Rough Trade로 대표되는 80년대 런던 인디 씬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다만 바셀린즈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습한 사도마조히즘을 10대의 성숙하지 못한 성적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대체했다. 또한 벨벳에게 시대의 불안을 표현하던 도구였던 바이올린의 불협화음을 좀 더 현대적이고 지루한 드럼머신으로 교체했다.
호기심과 두려움이라는 두 측면으로 대변되는 사춘기의 성적욕망은 바셀린즈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모순된 욕망은 텔레비전의 아나운서가 오늘 밤 내 침대로 기어들어올지 모른다는 순진한 상상('Molly's Lips')이면서 동시에 이성에 대한 관심을 공격으로 표현하는 어리석음('Monsterpussy', 'Bitch')으로 변하기도 한다. 바셀린즈의 가사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프로이트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신앙심의 발현이 아니라 성적인 두려움을 정당화하거나 씻어보려는 아이의 본능에 가깝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까운 거친 사운드와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자학적인 리듬, 그리고 과도하게 반복되는 멜로디는 그 어떤 성취감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인디의 본능을 트랙 깊숙이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커트 코베인이 이 밴드에 매료된 이유를 유추한다면 이것이 가장 적절한 추리가 될 것이다.
틴에이지도 슈퍼스타도 아닌 그냥 밴드
이 앨범은 밴드의 전 역사를 정리한 것이지만 그 전에 일단 앨범 자체의 족보를 이해해야 한다. 이 앨범의 뼈대가 되는 것은 1992년 서브팝Sub Pop이 내놓은 컴필레이션 음반 "The Way of the Vaselines: A Complete History"이다. 이 CD는 첫 두 장의 EP('Son of a Gun', 'Dying for It')와 1989년 발표한 LP "Dum-Dum"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그 후 2000년대 후반 밴드의 두 창조주, 유진 켈리Eugene Kelly와 프란시스 맥키Frances McKee가 바셀린즈라는 이름을 부활시켰고, 특히 2009년의 북미 투어에 나서자, 서브팝은 "The Way of the Vaselines"를 새롭게 리마스터링하고 여기에 데모와 라이브를 담은 보너스 디스크를 추가해 "Enter the Vaselines"를 선보였다.
두 앨범의 연속성은 내용물에만 있지 않고 타이틀에서도 유지됐다. 이유는 모르지만 두 앨범 모두 이소룡의 영화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요즘 유행하는 '딜럭스 에디션'이라는 메이저 레이블의 마케팅전략을 채용했지만, 짐짓 서로 다른 앨범인양 잰 척하고 있는 커버와 타이틀을 보면 소소하지만 여전히 인디스러움이 배어있다.
이미 언급했던 'Son of a Gun'의 충격은 데뷔 EP의 마지막 트랙이었던 'You Think You're a Man'까지 이어진다.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가사는 이후 바셀린즈의 가사에서 기둥이 되는 테마다. 또한 밴드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 곡은 바셀린즈가 어쩔 수 없는 80년대의 아이들임을 보여준다. 신스팝synthpop을 조악하게 재현하는 사운드는 밴드의 초기멤버들이 심심할 때 주로 듣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힌트다. (이 곡은 여장배우로 유명했던 디바인Divine이 1984년 발표한 곡이다. 바셀린즈는 후에 디바인의 다른 곡 'Oliver Twisted'를 커버했다.)
네 번째 트랙부터 일곱 번째 트랙은 두 번째 EP "Dying for It"의 수록곡이다. 만약 바셀린즈의 경력에 정점이라는 것이 존재하다면 그 시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 음반의 녹음과 발표다. 커트 코베인도 이 EP의 수록곡 중 두 개('Molly's Lips', 'Jesus Wants Me for a Sunbeam')를 커버하면서 음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데뷔 EP에 비하면 보다 펑크에 가까운 사운드지만 역시 피스톨즈나 클래쉬 같은 런던의 펑크보다는 레이몬스나 패티 스미스 같은 뉴욕 펑크에 더 가깝다. 특히 'Teenage Superstar'는 우리가 1988년으로 달려가 단 하나의 싱글만을 구출해야 한다고 가정할 때 필 콜린즈를 버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머지 트랙들은 인디의 메카 러프트레이드를 통해 선보였던 처음이자 마지막 LP "Dum-Dum"의 수록곡이다. 이 앨범은 꽉 찬 구성과 향상된 연주력을 담고 있지만 밴드에게는 묘비명이 되어버렸다. 밴드의 오랜 테마와 스타일은 유지됐지만 LP는 앞선 두 EP에서 들려준 긴장감이 많이 이완된 상태였다. 결국 밴드는 1년은 넘기지 못하고 해체됐다.
"Dum-Dum"에서 주목할 트랙은 포크록으로 변형된 'Oliver Twisted'와 XTC류의 네오사이키델릭 넘버인 'Lovecraft'다. 이 두곡은 바셀린즈가 성적테마와 음악적 한계를 넘어 다른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들이 3년만 더 지속됐더라면 우리가 기억하는 밴드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알파와 오메가 - 바셀린즈의 미공개 데모와 라이브 녹음
이런 종류의 기획이 다 그렇지만 두 번째 디스크에 갈무리된 트랙들은 자료적 가치를 제외하면 음악적 즐거움은 그리 크게 남지 않는다. 아무래도 미학보다는 고고학의 자세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처음에 이어지는 세곡의 데모녹음은 바셀린즈의 원초적 본성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들려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박스세트에 들어있는 데뷔 이전의 데모 테이프와 겹쳐지는 사운드다. 그러나 로파이Lo-fi 매니아가 아니라면 즐겨 듣기는 어려운 연주다.
다음 차례는 데뷔 EP 발매 전인 1986년 브리스톨에서 녹음된 라이브 트랙 다섯 곡이다. 테이블 밑의 찌든 맥주 냄새가 느껴질 만큼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어느 정도냐면 어디선가 취객이 던진 빈 맥주병이 날아올 것 같다. 하지만 연주에서 비범함이나 재능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관객 중 그 누구도 이 밴드가 레코딩 계약을 따내리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마음 편하게 듣기는 어렵다.
1988년 런던에서 녹음된 나머지 라이브 트랙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춘 밴드의 연주도 안정됐고, 무엇보다 무대와 객석의 긴장과 교감이 감상의 불편함을 덜어준다. 나름 다른 아티스트의 곡(게리 글리터Gary Glitter의 'I Didn't Know I Loved You')을 커버하는 여유도 보여준다. 두 번째 디스크의 마지막 9곡은 아이팟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 * *
"Enter the Vaselines"에 실린 36개의 트랙을 모두 들은 다음 처음의 질문, 인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용과 호랑이가 서로 마주보고 달려들듯이, 산업화된 음악과 본능적 창작이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정면충돌하는 대결이며 영원한 투쟁이다. 물론 누구도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by 장석원



덧글
giantroot 2009/10/29 23:27 # 삭제 답글
해설지, 무삭제 버전인가요? 아무튼 며칠 있다가 돈 생기면 질러야 되겠네요.
석원 2009/11/03 16:55 #
CD에 들어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
2009/10/29 23:4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석원 2009/11/03 16:55 #
기대까지야...욕만 안 먹으면 다행입지요.
지기 2009/10/30 13:42 # 답글
전 담달에 살께요~ㅎㅎ 역시 씨디를 아예 안살수는 없는 노릇...
석원 2009/11/03 16:56 #
지기님이 CD를 끊다니! 차라리 MB가 강을 안 판다는 이야기를 믿겠소.담배나 끊으시오.
basher 2009/10/30 13:54 # 삭제 답글
아 직접 쓰신 거군요 이제 알았습니다 ㅎㅎ구입했습니다만 ^^ 솔직히 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석원 2009/11/03 16:57 #
빠르기도 하십니다.만인이 사랑할만한 음악은 확실히 아니지요.